서안시 (西安市)
30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이곳은 주, 진, 전한, 수, 당나라 등 수많은 왕조의 수도였으며, 약 1,100년 이상이나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를 이루었다.역대 중국의 수도였던 북경, 서안, 낙양, 개봉, 남경, 항주 등의 6대 고도가운데 가장 오랜시간인 1100년 동안 중국의 수도로서 자리를 지켜왔다.
서안의 원래의 이름은 장안이었고, 장치구안(長治久安:장기적 통치안정)의 의미로 얻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 장안이 중국의 수도였던 것은 당대가 처음이 아니었다. 유방이 세운 한(漢)왕조도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 유방이 경쟁자였던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해 왕조를 연 것은 기원전 202년의 일이다.이 왕조는 200년 남짓 이어오다가 왕망에 의해 멸망하였다. 그 뒤에 한의 일족이었던 유수가 천하를 통일해 후한을 세웠는데 그때의 장안안 왕망의 난으로 페허가 되었기 때문에 동쪽의 낙양을 수도로 정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보통 유방이 처음 세운 한을 '전한(前漢)',유수 곧 광무제가 세운 왕조를 '후한(後漢)'이라고 하는데 중국에선 전자를 '서한(西漢)', 후자를 '동한(東漢)"이라 한다. 수도의 위치에 따라 부르는 방법을 정한 것이다. 당이 멸망한 뒤 10세기 전반은 반세기 동안에 '오대(五代)'로 불리는 다섯왕조가 일어섰다가 무너진 시기였는데 그렇게 단명한 왕조 가운데도 '후한'이라는 왕조가 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동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후한 전의 왕조였던 진의 수도였디 서안 시의 북서쪽에 위치한 함양이었다. 중국에서는 산의 남쪽을 양이라 하고, 북쪽을 음이라 한다. 하천의 경우는 그 반대로 강의 북쪽을 양이라하고, 남쪽을 음이라 한다. 함양은 구준산(九埈山)의 남쪽이며, 위수(渭水)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산이든 강이든 모두 양기를 띠기 때문에 '함양'이란 이름이 지어졌다. 유방이 천하를 통일했을 때 장안과 낙양이 도읍지 후보에 올랐다고 한다. 당시 '천하'를 염두에 두고 생가하면 낙양쪽이 천하의 중심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장안을 지지했던 누경(婁敬)은 이 지방을 '천부(天府)'라고 불렀다고 한다. 천연의 보물창고라는 의미다. 의미다.
유방이 장안으로 도읍을 정한 것은 누경의 주장에 장량(張良)이 찬성을 했기 때문이다. 유방을 장량을 전면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이다. 장량이 장안을 찬성했던 것은 낙양은 토지가 좁아 사방 수 백 리에 지나지 않으며 토지도 황폐했던데 비해 장안은 기름진 평야가 천 리로 , 남으로는 풍요로운 지방이 있고, 북으로는 다른 이민족과 통상을 통한 이익을 기대할 수 있었으며, 더구나 지형이 험난해 천연의 요새가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서한의 수도였던 장안도 내란이 일어나 황폐해졌기 때문에 후한은 낙양을 수도로 삼았다.
그로부터 수백년이 지난 뒤에서 장안은 다시 황금시대를 맞이 하게 된다.
수나라가 이곳에 새로운 수도를 건립한 이후에는 흥륭창성(興隆昌盛)의 뜻으로 대흥성(大興盛)이라 불리워졌다. 명나라 흥무2년(서기 1369년)에 서안에 정부를 세웠으며,"서안"이라는 지명은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가장 번창했던 때는 장안(長安)이라고 불렸던 당(618~907)대. 명 나라 전까지 장안으로 불린 서안은 당 태종 때까지만 해도 재정이 궁핍했으나, 당 고종 때부터 조금씩 사정이 나아지다 현종에 이르러 정성기를 이루며 로마와 함께 세계의 중심지로 등장한다. 당시 장안은 동서 10킬로미터, 남북 8킬로미터에 인구는 150만 명이었으며, 이 중 외국 사신들의 수는 약 4천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또한 서방의 대상이 비단을 사기 위해 파미르고원을 넘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해 왔으며, 이곳을 통해 중국인이 서방으로 갔기에 실크로드의 사실상 기점을 이룬곳이다. 이 길을 통해 서역과 서방제국 그리고 우리나라와도 활발한 문화교류를 하였다.
서안은 근대사 에서도 중요한 지역이다. 중국 근대사의 전화점이 되기도 하였던 서안사변이 이곳 서안의 화청지에서 일어나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기도 하였다. 1936년 12월 장학량을 원수로 하는 동북군과 양호성이 이끄는 십칠로군은 내전을 중지하고 중국을 핍박하는 일본을 공격하자는 주장을 내세웠다. 하지만 당시 중국 국민당정부의 장개석이 찬성을 하지 않자 장학령,양호성은 장개석을 서안의 화청지에서 연금하였다. 이 사건은 훗날 항일 국공합작의 발단이 되어 중국 현대사의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다









